본문 바로가기

NOWAR.NET


전쟁을 반대합니다


I. 공산당 선언의 배경

  • 4.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다

    마르크스가 활동하였던 시대적 상황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산업혁명의 시대,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 마지막으로 제국주의 시대이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인류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삶의 편리함과 풍요로움 뒤에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량 생산된 상품을 바탕으로 소수의 자본가는 엄청난 이윤을 차지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처럼 소수에게만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해결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예견하였다.

    1847년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 집필했다. 1848년 2월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의 문헌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읽혀진 고전이다. 불과 30페이지로 공표된 이 문헌이 오늘날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귀중한 역사적·이론적 문헌이 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최초로 공산주의를 공개선언하고 그 근본 원리를 밝혔다는 점도 있지만 『공산당선언』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들의 탁월한 문장력과 문학작품을 능가하는 표현과 수사 때문이기도 하다.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 the spectre of communism. AH the powers of old Europe have entered into a holy alliance to exorcise this spectre: Pope and Tsar: Metternich and Guizot: French Radicals and German police-spies.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너무도 시적이고, 상징적인 문장이다.

    “유럽에 유령이 출몰하였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쫒아내려고 신성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 속에서 족쇄 이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나는 그 유명한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하다

    『공산당선언』이라는 제목이 뿜어내는 강렬한 색채와 그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슷한 시기에 1848년 2월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기실 프랑스 왕정의 위기는 1845년부터 증대하기 시작했었다. 프랑스는 심한 재정난을 겪어온 데다, 몇 년에 걸친 곡물 흉작으로 곡가를 위시한 물가 앙등(昂騰)이 초래되었다. 여기에다 영국의 산업공황이 유럽 대륙 나라들의 경제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1847년 들어 경제 상황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전국에서 엄청난 실업이 발생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이 심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정황들을 배경으로 하여 발발한 2월 혁명은 2월 22일부터 2월 24일 사이의 사흘간 노동자 봉기로 정점을 이루었다. 2월 22일, 이날은 파리 마들렌느 광장에서 국민 연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 1만여 명이 연회장으로 모여 들었다. 광장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로 끝나는 ‘라 마르세예즈’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군중들은 ‘개혁 만세’, ‘기조 내각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큰 규모로 확대된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정규군을 투입했다. 군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항했으며,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시위대는 점점 더 불어났고,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이튿날인 2월 23일, 루이 필립 왕은 정규군 3만 명을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다. 시위 군중들은 ‘루이 필립 타도’, ‘공화정 만세’를 외치며 대항했다. 시위대의 대오가 불어나면서 국민방위대의 일부가 시위대쪽으로 합류했고,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루이 필립은 기조 내각을 물러나게 했다. 기조 내각의 실각으로 사태가 수습되는 듯 했으나, 밤이 깊어지면서 군대와 무력 시위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외무부와 수상 관저 앞에서 벌어진 돌발적인 총격전이 노동자들의 반란을 더한층 부추겼다. 총격전으로 50여 명이 사망했고, 국민방위대가 혁명파에 가담하게 되면서 국민방위대와 정규군이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월 24일에는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 1천 5백여 개가 둘러쳐지고 교통이 완전 차단되었다. 혁명파에 포위된 정규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일부가 국민방위대에 합류했다. 이날 파리 시청이 포위되고 국왕 퇴위와 공화국을 요구하는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난 뒤 국왕 루이 필립은 긴급 성명을 통해 왕좌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함으로써, 7월 왕정은 임시정부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1773~1850)이 ‘2월 혁명’으로 쫓겨나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자 노동자들 스스로 수도의 광장과 거리에서 공화제를 선포했다. 임시정부도 공화제 선언에 동의했다.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가 그것이다.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루이 필립의 부르주아 입헌 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유럽 전체가 혁명에 휩싸이다

    프랑스 왕정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정을 연 2월 혁명은 유럽 사회에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다. 주변국들은 ‘파리의 2월 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고, 부르주아는 사회 불안과 무정부상태를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열린 국민집회에서는 자유주의적 요구 수준을 넘는 청원들이 쏟아졌고 시위는 무력충돌 양상을 띠었다. 이에 더해 ‘독일연방 강화’라는 시대적 기치가 맞물리면서, 뮌헨에서는 루드비히 1세가 퇴위했고, 프로이센의 루드비히 빌헬름 4세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소멸, 새로운 독일의 탄생”을 선언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런던으로 추방되고 빈체제를 무너뜨렸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봉건제도의 철폐 요구가 민족자치 및 독립국가 운동과 맞물렸다. 이렇게 민족들의 자치와 헌법 제정 요구들이 분출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등의 통일과 독립 움직임이 본궤도에 올랐다. 벨기에는 네덜란드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회의를 열고 통일을 논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