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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반대합니다


I. 공산당 선언의 배경

  • 2. 마르크스, 헤겔을 뒤집다

    이런 환경에 울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사회 원리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을 구제하고 싶어 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자유경쟁에 규제를 가해 인간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시설을 공유하여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첩경이라 믿었다. 이렇듯 공산주의 초기 운동의 사상적 특징은 휴머니즘 정신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 대한 사고가 뒤섞여 있었다.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 등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에 가장 큰 반기를 든 것은 같은 유대인이었던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배움을 숭상하는 유대인답게 영국의 대영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한 공부벌레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경제학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자 행동하는 혁명가였다.

    그의 〈공산당선언〉은 가슴 속에서 북받쳐 나오는 울분에 다름 아니며 〈자본론〉은 당시 지옥 같은 노동환경 속에서 태어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사회주의의 바이블’로 평가되었다. 동시에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를 냉전의 세계에 몰아놓은 책이기도 하다.

    랍비 가계에서 태어난 칼 마르크스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1818년 유대인 가정의 7남매 가운데 셋째아들로 독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의 유명한 랍비였다. 외가도 네덜란드 랍비 집안이었다. 그런데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개업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개업한 자유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볼테르나 레싱 등의 저작을 읽고 계몽주의 사상을 견지하며 합리주의를 신봉했다. 가문의 성(姓)인 모르데카이는 마르쿠스(Markus)에 이어 마르크스(Marx)로 바꿨다. 마르크스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기독교 세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유대인 혈통의 마르크스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차차 종교를 혐오하게 됐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헤겔에 심취하다

    마르크스는 가족의 바람대로 1835년 본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학창 시절 마르크스는 괴테·셰익스피어·뒤마의 문학과 베토벤을 좋아한 낭만주의자였다. 본 법대를 다니긴 했지만 문학·역사·철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특히 마르크스의 장인이 될 시의원 베스트팔렌 남작의 영향이 강했다. 마르크스의 열정적인 문장력은 이 시기 낭만주의 문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더욱 성공하도록 이듬해 1836년에 베를린 대학 법학과로 진학시킨다.

    마르크스는 사회 변화의 근원적인 원동력에 대한 답을 찾아 지적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사회의 외형적 변화보다는 그 변화를 이루어내는 본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그가 전공하던 법률은 아무 설명도 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만나 헤겔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대 독일 최고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혁명론에 심취했다.

    마르크스가 반한 헤겔 철학

    헤겔은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가로서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렸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머리에서 생각한 이상을 현실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흐름에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다. 역사는 절대자가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이고 그 본질은 자유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으로: 단 한 사람 전제군주만 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 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파에 참여했다. 당시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의 철학은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 등의 조류를 낳으면서 대학생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은 ‘인간 소외’를 중심으로 한 다소 철학적인 면이 있었다.

    마르크스의 초기를 흔히 자유주의 시기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주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적이었던 독일의 정치 체제를 기본적인 권리가 신장되고 민주적인 제도들이 정착되는 사회로 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그 시절에 관계를 맺었던 비슷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소위 ‘청년헤겔파’이다. 헤겔의 청년 시기의 초기 사상을 헤겔 사상의 핵심으로 보고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청년 헤겔파는 급진적 정치철학자로서의 헤겔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그 그룹의 일원으로서 마르크스가 지적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헤겔의 차이

    다만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관념적 측면을 물질적 조건을 강조하는 유물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포이어바흐의 영향이 컸다. 포이어바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으며, 종교는 인간 소외의 표현”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발전시켜, 헤겔이 절대정신의 구현자로서 국가와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집단을 보편적 계급으로 찬양했던 것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라는 생각을 발전시켰으며, 관료집단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 계급이 보편적 계급으로서 해방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노동계급은 다른 신분들을 해방시키지 않고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는 신분”이라는 말에 잘 드러난다. 즉 노동 계급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으므로, 노동계급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면 사회 전체의 모순도 연이어서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그의 초기 미완성저작인 〈경제학·철학 수고〉의 ‘노동 소외I’를 다루는 논의에 기초하고 있다. 헤겔의 정신의 소외 논의를 탐구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동 소외를 발견하게 된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인간의 노동을 통한 생산 활동인데, 노동은 생산활동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자기창조 도구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생산 활동 자체로부터도 소외된다. 이들은 나아가 노동자 및 다른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되며, 결국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도 박탈당한다. 이러한 노동자의 소외를 탐구하기 위해서 이후 마르크스는 철학적 작업을 뛰어 넘어, 역사적·경제학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 결과가 마르크스의 후기 대표 저작인 〈자본론〉에 드러난다.

    마르크스, 헤겔을 뒤집다

    헤겔은 역사의 추동력을 변증법적 ‘이성’에서 찾았다. 그리고 19세기 당대 유럽의 놀라운 진보는 모두 이성의 힘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현실 세계에서 비밀 경찰의 힘으로 유지되는 절대 왕정을 도저히 이성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논리를 뒤집는다. 절대이성이 현실을 만들어 낸 게 아니라 현실 사회의 생산력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았다. 철학을 통해 현실을 이해해서는 안 되고, 현실을 통해 철학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기만 해왔다. 하지만 이제 철학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헤겔 좌파에 속한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대해 해석을 달리했다. 정신적 상황이 물질을 결정한다는 헤겔의 학설을 물질이 정신적 상황을 결정한다고 반대로 생각했다. 유물론의 태동이었다. 이 시기부터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이 현세에 겪는 고통을 내세의 환상으로 도피시키려는 민중의 아편”으로 폄하했다. 그때부터 헤겔의 종교관에 반대하여 무신론적 급진자유주의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