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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반대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도덕적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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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앞의 이야기에 있던 미군 병사들이나 전차목격자처럼 치명적인 선택에 직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딜레마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개인적 혹은 공적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 도덕적 주장을 전개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민주 사회에서 살다보면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낙태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고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력으로 번 돈을 세금으로 빼앗는 행위는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 입시에서 소수 집단우대 정책이 잘못을 바로잡는 정책이라고 옹호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인재를 역차별하는 공정치 못한 정책이라고 비난한다. 테러 용의자를 고문하는 행위를 자유 사회에 걸맞지 않은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테러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예방 수단이라고 찬성하는 이들도 있다.

 

 선거에서는 어떤 견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를 둘러싸고 소위 문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도덕 문제를 놓고 격하고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의 범위를 넘어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인해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도덕에 호소해 상대를 설득할 수는 없으며, 정의와 권리에 대해 공적인 토론을 벌이는 것은 독단적인 주장의 공세일 뿐, 마구잡이 이념 싸움과 다를 바 없다. 최악으로 치달을 때는 우리의 정치가 그런 상황이 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 내면에서 어떻게 도덕적 사유가 자연스레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옳은 행위에 대한 견해나 확신(‘전차를 측선 철로 쪽으로 틀어라’)에서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근거가 되는 원칙(‘한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게 낫다”)을 찾는다. 그다음 그 원칙에 반하는 상황(‘가능한 한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늘 옳을 줄 알았는데, 남자를 다리 아래로 미는 행위 [혹은 무장하지 않은 염소 목동들을 죽이는 행위]는 잘못인 것 같다’)을 맞닥뜨리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다.

 

 이러한 긴장에 직면했을 때, 옳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재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조정하기도 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성의 영역에서 행동의 세계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

 

 도덕적 주장을 만들어 나가는 이러한 방식, 즉 특정한 상황에서의 판단과 심사숙고를 통해 확정한 원칙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대화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처럼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정의나 도덕적 진실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가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에 입각해 평생을 헌신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되풀이되는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도덕적 사고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하고자 한다. 따라서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의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 대화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없다.

 

 플라톤(Platon)의 『국가론(Republic)』에서 소크라테스는 일반 시민을 동굴에 갇힌 포로에 비유한다. 이들이 보는 것은 벽에 드리운 그림자의 움직임, 즉 이들로서는 결코 파악하지 못할 실체의 그림자뿐이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오직 철학자만이 한낮의 빛이 있는 바깥으로 나가 실체를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태양을 본 철학자만이 (그들을 다시 동굴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동굴에 사는 사람들을 지배할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정의의 의미와 좋은 삶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견과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라고 플라톤은 지적한다. 그의 지적이 옳기는 해도, 내 생각엔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동굴의 비유로 어느 정도로만 타당한 것이다. 만약 도덕적 사고가 변증법적인 사유라면(즉 구체적 상황에서의 판단과 그 판단을 형성하는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면), 비록 불완전하거나 교육으로 다듬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나름의 견해와 확신이 사고의 기반과 재료로 존재해야 한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철학이란 그저 메마른 이상향일 뿐이다.

 

 도덕적 사고를 정치에 적용해 공동체의 삶을 어떤 법으로 다스릴지 물을 때는, 도시의 시끌벅적한 참여,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휘저을 주장과 사건이 필요하다. 구제 금융, 가격 폭리, 소득 불평등,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병역, 동성 결혼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 철학의 문제다. 이 문제들은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까다로운 시민들을 상대로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분명히 하고 정당화하라고 촉구한다.

 

 한층 더 까다로운 상대는 정치 철학자등이다. 고대와 근현대 정치 철학자들은 시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개념들(정의와 권리, 의무와 합의, 명예와 미덕, 도덕과 법)을 때로는 급진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존 롤스(John Lawls)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을 연대순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 책은 사상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도덕적, 철학적 사고를 여행한다. 이 책의 목적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 주는 정치 사상사를 다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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