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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반대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복지,자유,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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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제기한 질문은 단지 개인 간의 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곧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의 의미를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 의미를 따져 보기 시작했다. 가격폭리방지법에 대한 찬반 주장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복지, 자유, 미덕이라는 세 가지 항목에 각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정의를 각기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시장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요소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바로 복지와 자유다. 첫째, 시장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공급업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가시킨다(복지(welfare)란 용어는 사회의 안녕이라는 측면의 비경제적 요소까지 아우르는 보다 넓은 개념이지만, 대개는 경제적 번영을 일컫는다). 둘째, 시장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재화나 용역에 어떤 특정한 가치를 강제로 부여하기보다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이 교환하고자 하는 것에 가치를 매기도록 한다.

 

 놀랄 것도 없이 가격폭리방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이 같은 귀에 익은 두 가지 논리를 내세운다. 한편 가격폭리방지법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첫째, 어려운 시기에 과도한 가격 인상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늘리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가격이 올라가면 그 상품의 공급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이익은 그 가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지는 부담으로 상쇄되고 만다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은 허리케인으로 인해 기름 한 통이나 모텔 방값이 올랐다고 하더라도 조금 성가신 정도지만, 서민에게는 심각한 고통이기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느니 위험하더라도 그냥 집에 머물 수밖에 없다. 가격폭리방지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복지의 총량을 측정할 때는 비상시에 가격 폭등으로 생필품을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가격폭리방지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자유 시장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강요받는 구매자에게 자유는 없다. 안전한 숙박 시설 같은 생필품의 구매는 사실상 강요받는 것이다.” 허리케인을 피해 가족과 함께 대피하면서 가솔린이나 안전한 잠자리 같은 생필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을 내고 사야 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발적 교환이 아니다. 강탈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러므로 가격폭리방지법이 정당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복지와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비교해 봐야 한다.

 

 그런데 고려해야할 또 다른 주장이 있다. 가격폭리방지법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대개 복지나 자유보다 더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절박함을 먹잇감으로 삼는 ‘약탈자’에게 분노하며 그들에게 뜻밖의 횡재를 안겨 주기보다는 처벌하고 싶어 한다. 흔히 이런 정서는 공공 정책이나 법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원초적 감정으로 여겨져 무시되곤 한다. 저코비의 말대로 “상인들을 악마 취급한다고 플로리다가 빨리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10)

 

 하지만 가격 폭리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비이성적인 분노는 아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도덕적 주장이다. 이익을 취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폭리를 얻는다고 생각되어 느껴지는 특별한 종류의 분노, 즉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자등의 지나친 탐욕”이라는 크리스트의 언급은 그러한 도덕적 측면에서 우러나온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크리스트는 이 같은 도덕적 정서와 가격폭리방지법을 대놓고 연관시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언급 속에는 다음과 같이 미덕을 중시하는 정의에 관한 주장이 담겨 있다.

 

 탐욕은 악덕이고 나쁜 태도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망각하게 만들 때는 더욱 그러하다.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악덕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민의 미덕과도 상충한다. 좋은 사회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간다.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기보다는 서로를 챙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이웃으로부터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탐욕은 좋은 사회라면 최대한 억제해야 하는 악덕이다. 가격폭리방지법으로 탐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독한 탐욕은 억제시키며, 사회가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낼 수는 있다. 사회가 탐욕스러운 행동에 포상하기보다는 벌을 중으로써 공동선을 위해 함께 희생을 감수하는 시민의 미덕을 지지한다.

 

 미덕을 중시하는 주장의 도덕적 효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미덕과 경쟁하는 다른 고려 항목보다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공동체는 상황에 따라서 악마의 거래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탐욕을 규제하는 도덕적 조치를 희생하는 대신 폭리를 허용함으로써 먼 곳에 있는 지붕 수리업자 들과 건물 수리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붕부터 수리하고 사회 구조는 나중에 손보는 것 이다. 그런데 주목할 중요한 점은, 가격폭리방지법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복지와 자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논쟁은 미덕에 관한, 즉 좋은 사회의 기반이 되는 태도와 기질, 인격을 길러 내는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미덕과 관련짓는 논변에는 어떤 사람들, 심지어 가격폭리방지법에 찬성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불편해한다. 그 이유는 복지와 자유를 앞세우는 주장에 비해 판단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 경제 회복을 빠르게 하는지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지 여부를 묻는 데는 사람들의 선호에 대한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질문은 누구나 적은 수입보다는 많은 수입을 선호한다고 가정할 뿐이며, 그들이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 심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강요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정말로 선택의 자유가 없었는지를 묻는 것에는 그들의 선택에 대한 평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했는지, 혹은 강제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웠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반면, 미덕 논변은 탐욕은 악덕이며 주 정부가 나서서 억제해야 한다는 판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미덕이고 무엇이 악덕인지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다원화된 사회의 시민은 그러한 판단에 반대하지 않는가? 또한 미덕에 대한 판단을 법으로 부과하는 것은 위험한 일 아니겠는가? 이러한 우려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들은 미덕과 악덕의 문제에 대해 정부가 중립을 견지해야 하며, 또한 선한 태도를 배양하려 하거나 악한 태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격 폭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잘 살펴보면 이중적임을 알 수 있다. 자격 없는 사람이 이득을 얻으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다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하는 탐욕에 대해서는 포상이 아니라 벌을 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법을 통해 미덕과 악덕을 심판하려 할 때는 우려를 나타낸다.

 

 이런 딜레마는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문제 하나를 드러낸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에게 미덕을 장려해야 할까, 아니면 법이 미덕을 둘러싼 서로 다른 견해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들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 하도록 해야 할까?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이 질문을 기준으로 고대 정치사상과 근대 정치사상을 구분하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이 설명은 옳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B. C. 322)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려면, 어떤 미덕에 명예와 포상을 주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어떤 삶의 방식이 바람직한 것인지 심사숙고하지 않고서는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이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근대 정치 철학자등(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부터 20세기의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은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무엇이 미덕이며 최선의 삶의 방식인가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대신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이 각자 생각하는 좋은 삶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둘의 장단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우선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대조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치를 움직이는 정의에 관한 주장들(철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의 견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내세우는 주장을 보면 최소한 겉으로는 경제적 풍요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명예와 포상을 누릴 미덕이 무엇이며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할 생활 방식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일련의 또 다른 신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때때로 서로 경쟁한다. 즉 풍요와 자유를 굳건히 지지하면서도, 정의에 있어서 판단의 요소를 개입시키고자 하는 한 가닥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정의에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미덕도 포함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정의에 대한 고민은 불가피하게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 역시 포합시킬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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