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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02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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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THE GREATEST HAPPINESS PRINCIPLE

UTILITARIANISM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들이 타고 온 미뇨네트호(Mignonette)는 폭풍에 가라앉았고, 구명보트에는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를 제외하곤 마실 물조차 없었다. 이 보트에는 선장 토머스 더들리(Thomas Dudley), 일등 항해사 에드윈 스티븐스(Edwin Stephens), 일반 선원 에드먼드 브룩스(Edmund Brooks)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고 신문은 전했다.1)

 

 그리고 네 번째 승무원은 배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열일곱 살 소년 리처드 파커(Richard Parker)였다. 고아인 파커가 먼 항해 길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커는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다운 야망과 희망을 품고’ 배에 올랐으며, 이번 항해를 통해 남자다워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네 사람은 지나가는 배를 만나 구조되기를 바라며, 수평선을 지켜보았다. 처음 3일 동안은 순무를 정해 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4일째 되던 날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바다거북과 남은 순무로 연명하며 며칠을 더 버텼다. 그리고 이후로 8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이즈음 파커는 구명보트 한쪽에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바닷물을 마시다가 탈이 났기 때문이었다.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19일째 날, 선장 더들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하자고 했다. 하지만 브룩스가 거부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음 날도 지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다. 더들리는 브룩스의 고개를 돌리게 하고는 스티븐스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더들리는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칼로 파커의 목에 있는 정맥을 찔렀다. 양심에 찔려 그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그렇게 세 남자는 파커의 살과 피로 나흘을 더 연명했다.

 

 이윽고 구조의 손길이 나타났다. 더들리는 당시 상황을 일기에 놀라운 완곡 어구로 표현했다. “24일째 되던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배가 나타났다.” 생존자 세 명 모두 구조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브룩스는 검찰 측 증인으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파커를 죽이고 그를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었노라고 주장했다.

 

 당신이 판사라면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일단 법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오로지 그 소년을 죽인 짓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인지만 결정하면 된다고 가정하자.

 

 피고 측이 가장 강력히 주장한 바는 당시 끔찍했던 상황에서는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죽여서 먹지 않으면, 네 사람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파커는 곧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또한 파커는 더들리나 스티븐스와 달리 부양할 가족도 없었다. 그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살길이 막막해지거나 슬퍼할 아내나 자식도 없었다.

 

 이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 첫째, 파커를 죽여서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정말로 컸는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살아난 사람의 숫자, 그리고 생존자 및 그 가족의 행복을 고려한다 해도, 그들이 저지른 살인을 허용한다면 사회 전체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에 반대하는 규범이 약화 되거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법을 해석하려는 성향이 늘어나거나, 선장이 배에서 일할 사환을 구하기 어려워 질 수도 있다.

 

 둘째,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이익이 희생이라는 비용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무방비 상태의 사환 소년을 죽여서 먹는 행위는 사회적 비용이나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남을 이용하는 행위(타인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동의 없이 목숨을 빼앗는 짓)는 나쁜 짓 아닌가?

 

 더들리와 스티븐스의 행동에 몸서리 친 사람에겐 첫 번째 반박이 미지근한 불평으로 보일 것이다. 이 반박은, 도덕이란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자등의 사고를 받아들여,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더 많이 계산하고자 했다. 만약 그 소년을 죽인 행위가 도덕적 분노를 일으킬 만한 행위라면, 두 번째 반박이 더 적절하다. 이 반박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이익이 얼마인지 결과만을 계산하면 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또한 도덕이란 그 이상의 무언가(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적절한 방식 등)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사고방식은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시각은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그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행위든 그로 인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내면 옳다고 본다. 두 번째 시각은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무와 권리는 사회적 결과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구명보트 사건이나 그보다는 덜 극단적인 우리 일상생활에서의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의 커다란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도덕은 목숨을 숫자로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권리가 그토록 기본적인 것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기본 권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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