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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大學

<대학(大學)>에 들어 가기에 앞서

본문

대학의 개요(槪要)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서(序) 첫머리에 보면, <대학(大學)>이란 책은 ‘옛날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을 다룬 것이다’ 라고 하였고,  독대학법(讀大學法)에서도,  "...<대학(大學)>은 공자께서 옛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대방(大方)을 말씀하신 것을  증자(曾子)께서 술(述) 하시고, 그의 문인(門人)이 또 전술(傳述)하여 그 뜻을 밝힌 것으로..."라고 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정이(程頤)는 "초학(初學)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門)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대학>은 학문의 완성을 위하여 수득(修得)해야 할 도리(道理)를 적은 것으로, 학문의 완성이란 온전한 사람, 덕(德)을 지닌 군자, 또는 성인(聖人)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역시 <대학장구(大學章句)>서(序) 말미(末尾)에 보면, "...그러나 국가가 백성들을 교화 시키고, 양속(良俗)을 이룩하려는 의도와, 학자가 제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에는 반드시 조그만 도움이없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위의 언급을 살펴보면 <대학>은 유학(儒學)의 이상적 목표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차례로 설멸까지 곁들인 것으로 유교적인 실천철학의 방법서(方法書)이자, 덕치주의(德治主義)의 한 가지 개론(槪論)이라고 하겠다.

 

주희가 <대학>을 특히 중요시 한 이유는, <대학>이 성리철학(性理哲學) 발전에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다는 사실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 담긴 사상만을 보더라도 이는<맹자(孟子)>·<순자(荀子)>나 <중용(中庸)>의 사상을 총합(總合)하여 체계적으로 그 기본사상을 간추린 것이다. 유교 경전에 있어서 이처럼 그 이상과 방법을 조리있게 서술한 글은, <대학>이 처음인 것이다. 삼강령과 팔조목의 정연한 배포(配布)는 모든 유가(儒家)의 이론을 포괄(包括)하고 통째로 섭렵할 수 있는, 완전하고 밀도있는 하나의 가구(架構)이므로 이것에 통달한 뒤에 다른경전을 읽으면 유학의 전 체계를 올바로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학의 유래(由來)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원시(原始)의 유학(儒學)은 공자에 의해서 주창(主倉)되었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맹자와 순자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이시대의 경전(經典)으로는 뒷날 육경(六經)이라고 부르는 시(詩)·서(書)·역(易)·예(禮)·악(樂)·춘추(春秋)가 있었고, <논어>와 <맹자>와 <순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술이편(述而篇)에서 "얘기는 하지만 저술(著述)은 하지 않았고 믿음을 지니어 옛 것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듯이, 육경(六經)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오는 글이나 문서 따위를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약간의 산정(刪正)과 수찬(修賛)을 가(加)했을 뿐이요, 공자 자신이 저작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육경은 유가(儒家)에서 뿐만 아니라,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등에서도 사용하던 고전들이다. 그래서 순수한 유가의 기본경전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맹자> 그리고 순자가 가필로 저작한<순자>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의 유학은 제자학파(諸者學派)와 대등한 입장에서 논쟁을 하다가 비로소 각파를 물리치고 독존(獨尊)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단계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주(周)나라중심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서 겸약공매(兼弱攻昧)의 전국시대(戰局時代)를 거쳐 드디어 240년간의 분열과 혼란의 막을 닫고, 진한(秦漢)의 통일제국 시대까지 진전된다. 이때 진시황(秦始皇)이 이사(李斯)의 진언(進言)에 따라 유가(儒家)에 대하여 혹독한 통제정책을 씀으로 하여, 많은 유교의 경전이 불타 없어졌으나,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유학이 장려되어,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작업이 시작 되었다. 곧 한무제(漢武帝)는 동중서(董重舒)의 건의에 따라 백가(百家)를 물리쳐 유학자를 등용하고, 진시황(秦始皇) 때에 산실(散失)되었던 유교의 경전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해석하는 작업이 이루어 졌다. 이 때 육경(六經)중에 <악경(樂經)>은  없어 지고, <시(詩)>·<서(書)>·<역(易)>·<예(禮)>·<춘추(春秋)>등 다섯 경전이 남아 있어, 이를 맡아 하는 사람들을 오경박사(五經博士)라고 불렀다. 오경박사였던 후창(后倉)의 문하(門下)에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이 있었는데, 이들은 숙질(叔姪)간이었으므로, 숙부(叔父)인 대덕은 대덕(戴德), 조카인 대성은 소대(小戴)라고 일컬었다. 대덕은 선진(先秦) 시대의 유학자들이 기록한 예(禮)에 관한 문헌을 모아서 일종의 예서(禮書)를 편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산만하고 정요(精要)하지를 못하여, 대성(戴聖)이 다시 간추리고 고쳐서 <예기(禮記)> 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리하여 <예기>는 대덕의 것과 대성의 것 두 가지가 전해 오게 되었는데, 전자를 <대대례기(大戴禮記)>, 후자를 <소대례기(小戴禮記)>라고 부른다.

<대학>은 본래 <소대례기>49편 가운데 제 42편으로 수록 되어 있었다. <예기>는 유교의 윤리, 도덕의 이론과 그 실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 문제까지, 논하고 있었으므로, 유교를 국시(國施)로 삼아 온 지난 날 동방 여러 나라의 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오던 고전(古典)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제42편은 다른편에 견주어 독특한 내용과 구체적인 사상을 담고 있어서 일찌기 주의를 끌어 왔었다.

그러나 육조시대(六祖時代)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 까지, <대학>은 여러 학자들에게 별로, 조명(照明)을 받지 못하였다.  <대학>과 함께 <예기>에 수록 되어 있던 <중용(中庸)>은 육조시대 부터 이를 <예기>에서 떼어내, 그 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唐)나라에 이르기 까지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가 성행 하여 <대학>의 수신(修身)과 명덕(明德)을 바탕으로 한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사상은 당시 학자들의 취향(趣向)에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에 와서야 비로소 한유(韓愈: 768~827)에 의해, <대학>의 내용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 하였다. 한유는 원도(原道) 라는 글에서 요순(堯舜) 에서 부터 공자, 맹자로 이어 지는 유학의 전통을 논(論)하였는데,  여기서 <대학> 팔조목의 장(章)을 끌어 내어 수신(修身)으로 부터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것을, 도의(道義)의 근거(根據)로 삼았다. 그리고 "그러한즉 옛날의 이른바 정심(正心)을 하고 성의(誠意)한다는것은 유위(有爲)한 일을 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불가나 도가들이 그 마음을 다스리려 하면서도 천하(天下)국가(國家)를 도외시하고 천륜(天倫)을 거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데서 출발하기는 <대학>도 불교나 도교와 마찬가지이나,그 도(道)의 목표가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고, 이르지 않음에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한유(韓愈)의 뒤를이어 이고(李翶)가 <복성서(復性書)>를 지었는데, 이것은 <중용> · <역경> · <대학>을 근거로하여 유가(儒家)의 심(心)·성(性)·정(情)·성인(聖人)의 뜻과,  수양법(修養法)을  논(論)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至)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한유(韓愈)가 그의 유학을 철학(哲學)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또 이고(李翶)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위와 같은 <대학>을 드러낸 것은, 송대(宋代) 이학(理學)의 단서(端緖)를 열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송대(宋代)에 와서 <대학>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 되었다. 조정에서 <중용>과 함께 <대학>을 하사(下賜)하는 것을 상례(常禮)로 할 정도로, <대학>을 높였으므로, 중신(重臣)들도 그들의 주의(奏議) 등에는 <대학>을 받드는 기풍이 생겼다.  증공(증공: 1019~1083)은 <대학>이 <서경>의 홍범편(洪範篇)과 함께 치도(治道)의 근본을 얘기한 것이라하였고, 사마광(司馬光: 1019~1086)등도 <대학>은 제왕이 덕을 이루는 근본적인 방법을 얘기한것이라고 했다. 또 범조우(범조우: 1041~1089)는 <제학(帝學)>8권을 지어, 상고(上古)의 복희로부터 송대(宋代) 신종(神宗)에 이르기 까지 역대(歷代) 성군(聖君)의 정교(政敎)를 논하였는데, 거기에서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으로 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도(道)를 요순(堯舜)의 도(道) 곧 제왕학(帝王學)의 원리하고 하였다.

송대(宋代) 이전에 <대학>을 <예기>에서  분리한 일은 없었다. 서한(西漢)의 유향(劉向: BC.77~6)이 <대학>은 유교의 최고 교육 이념을  통론(通論)한 것이라 믿어 그의 별록(別錄) 에서 <대학>을 통론류(通論類)에 열입(列入)한 경우는 있었다. 사마광(司馬光)이 <중용(中庸) · 대학광의(大學廣義)>를 저술함으로써 <대학>을 <중용>과 함께 <예기(예기)>에서 떼어내어 취급한것이 아마 최초의 분리로 추측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두 형제는, 특히 이 <대학>과 <중용>에  연토(硏討)를 가(加)했고, 남송(南宋) 순희(淳熙) 연간에 이르러, 위 두편의 글을 중요시 하고 위 이정자(二程子)의 토구(討究)를 계승한, 주희(朱熹)의 손에 의하여  비로소 각각 단행본(單行本)으로 독립되었다.

주희(朱熹)는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완성하고 동시에 <대학>과 <중용>의 가치를  <논어>와 <맹자>와 동등하게  인정하여, 이른바 사서(四書)라고 하였다. 그로 부터 사서(四書)는, 오경(五經)과 함께  동양 유교국(儒敎國)의 학자들의 필수서(必修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유교의 기본 경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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